문왕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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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왕은 발해의 제3대 왕으로, 737년 부왕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되었으며, 재위 기간 동안 대흥, 보력 등의 연호를 사용했다. 문왕은 당나라와의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50회 이상 조공을 바치는 등 외교를 중시했다. 또한 신라, 일본과도 교류를 증진했으며, 불교와 유교를 장려하고, 수도를 여러 차례 옮기는 등 내정에도 힘썼다. 문왕은 56년간 재위하다 793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딸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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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왕 (발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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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중국어 이름 | 간체자: 文王 병음: Wénwáng 웨이드-자일스: Wun Wang |
중국어 본명 | 간체자: 大钦茂 병음: Dà Qīnmào 웨이드-자일스: Ta Ch'in Mao |
한국어 이름 | 문왕 |
한자 | 文王 |
로마자 표기 | 국어의 로마자 표기: Mun wang 매큔-라이샤워 표기: Mun wang |
한국어 본명 | 대흠무 |
한자 본명 | 大欽茂 |
로마자 표기 본명 | 국어의 로마자 표기: Dae Heummu 매큔-라이샤워 표기: Tae Hŭmmu |
왕조 정보 | |
왕조 | 발해 |
대수 | 제3대 |
호칭 | 왕 |
재위 기간 | 737년 - 793년 |
연호 | 대흥: 738년 - 794년 보력: 774년 - ?년 (대흥의 일시적 사용) |
시호 | 문왕,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
묘호 | 미상 |
휘 | 대흠무 |
자 | 미상 |
능묘 | 미상 |
수도 | |
수도 | 구국 → 상경용천부 → 동경용원부 |
가족 관계 | |
부친 | 무왕 |
모친 | 미상 |
왕후 | 효의황후 모씨https://m.thepaper.cn/newsDetail_forward_1458142 |
자녀 | 대굉림 대정알 대영준 대숭린 정혜공주 정효공주 |
생애 | |
출생 | 미상 |
사망 | 대흥 56년 (793년) |
기타 | |
가독부 | 가독부 |
2. 생애
737년, 아버지 무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 직후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 등으로 책봉받았으나, 당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발해의 자주성을 드러냈다.
문왕은 아버지 무왕의 강경책과는 달리 당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758년 안녹산의 난 진압을 위한 파병 요청을 거부하고, 781년 당에 맞서던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에게 군마를 지원하는 등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과는 신라 견제를 위한 공동 군사 행동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고, 772년에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천손(天孫)'이라 칭하여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9]
내정에서는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이되 발해의 실정에 맞게 변형하여 3성 6부를 비롯한 중앙 및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여러 차례 수도를 옮기며 통치 체제를 강화했다. 발해의 3성 6부는 명칭과 운영 방식에서 당나라와 차이를 보였으며, 특히 행정을 총괄하는 정당성의 권한이 강했다.
793년까지 5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재위하며 발해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아들인 태자 대굉림이 일찍 사망하여 후계 구도에 혼란이 있었다. 사후 종제인 대원의와 손자 성왕이 차례로 즉위했으나 모두 단명했고, 결국 막내아들인 강왕이 왕위를 이었다. 이후 강왕의 요청으로 당나라로부터 국왕(國王)으로 추증되었다. 다만, 신당서에는 이미 762년에 문왕이 당으로부터 국왕으로 책봉되었다는 기록(寶應元年 詔以渤海爲國 欽茂王之 進檢校太尉zho)도 있어, 추증 시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2. 1. 즉위 초
737년, 대당(對唐) 강경책을 구사하던 아버지 무왕이 붕어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당나라는 즉시 내시 단수간(段守簡)을 보내 그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 직위와 좌효위대장군 흘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 忽汗州都督) 직위를 책봉했다. 『구당서』 199권 발해말갈조에 따르면, 문왕은 즉위 후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즉위 직후부터 당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독자적인 연호인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을 제정하여 사용했으며, 말년에는 다시 대흥 연호를 사용했다. 이는 발해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조치였다.
문왕은 아버지 무왕과 달리 전반적으로 당나라와의 평화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당나라의 필요 이상의 요구에는 단호히 응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758년, 당나라는 755년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기병 4만 명의 파병을 발해에 요청했지만, 문왕은 이를 거절하며 국가의 자주성을 지켰다.
752년(대흥 15년)에는 보국대장군 모시몽(慕施蒙) 등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함께 신라를 정벌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속일본기』에 따르면, 일본 측은 과거 고구려가 일본에 신하로서 예의를 갖추었다는 점을 들며 발해가 일본을 상국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아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772년 3월에는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 그는 일본 천황에게 보내는 국서(國書)에 스스로를 '천손(天孫)'이라 칭하고 발해와 일본의 관계를 장인과 사위(舅甥)에 비유했다. 국서를 읽은 일본 천황 고닌 천황은 격노하며 고구려 때에도 형제를 칭했는데 장인과 사위라는 표현은 예를 잃은 것이라고 발해 사신에 대한 예우를 철회하려 했다. 그러나 발해 사신 만복(萬福)이 서식 표현을 고치겠다고 하여 무마되었다.[9]
2. 2. 당과의 관계
737년, 무왕이 사망하자 문왕이 즉위하였다. 당나라는 즉시 내시 단수간(段守簡)을 보내 문왕을 발해군왕(渤海郡王) 및 좌효위대장군 흘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 忽汗州都督)으로 책봉했다. 구당서 199권 발해말갈조에 따르면, 문왕은 즉위 후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문왕은 아버지 무왕의 대당 강경책과는 달리 전반적으로 당나라와의 평화 기조를 유지했다. 재위 기간 동안 기록된 것만 50회 이상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이는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당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목적이 있었다. 고왕 대조영이나 무왕 때에도 유학생 파견과 한적(漢籍) 도입이 있었지만, 문왕 대에 이르러 유학생 수가 크게 늘었고, 많은 서적이 발해로 유입되었다. 정혜공주묘와 정효공주묘 비문에는 『상서』, 『시경』, 『역경』, 『예기』, 『춘추』, 『논어』, 『맹자』, 『사기』, 『한서』, 『후한서』, 『진서』 등 다양한 중국 고전이 인용되어 있어 당시 활발했던 문화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1] 발해 학자들은 당의 국자감을 본떠 주자감(胄子監)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왕은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며 발해의 자주성을 드러냈다. 또한 당의 필요 이상의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 758년, 당나라는 안녹산의 난 진압을 위해 기병 4만 명의 파병을 요청했지만 문왕은 이를 거절했다. 781년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평로치청절도사에 올라 당에 맞서 싸우던 이정기에게 군사력 강화에 필수적인 군마(軍馬)를 수출하기도 했다. 이 일이 당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발해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인 변용을 가했다. 정부 조직은 당의 3성 6부를 기본으로 했지만, 명칭과 운영 방식에서 차이를 보였다. 발해의 3성은 선조성, 중대성, 정당성이었고, 6부는 충(忠), 인(仁), 의(義), 지(智), 예(禮), 신(信)으로 구성되었다. 당에서는 정책 심의 기구인 문하성과 중서성이 행정 기구인 상서성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발해에서는 행정을 총괄하는 정당성의 수장인 대내상(大內相)이 선조성과 중대성의 좌·우상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며 실질적인 최고 권력 기구 역할을 했다. 이는 발해의 실정에 맞게 제도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변형했음을 보여준다.
당나라는 문왕에게 여러 차례 관직을 수여하며 관계를 유지했다.
시기 | 관직 | 출처 |
---|---|---|
즉위 직후 (737년) | 발해군왕, 좌효위대장군 흘한주도독 | 구당서 |
즉위 이후 | 좌금오대장군 | 구당서 |
당 현종 천보 연간 (742년~756년) | 태자첨사, 빈객 | 구당서 |
당 대종 대력 연간 (766년~779년) | 사공, 태위 | 구당서 |
당 숙종 보응 원년 (762년) | 발해 국왕, 검교태위 | 신당서 |
한편, 신당서 219권에는 당 숙종 보응 원년(762년)에 당이 조서를 내려 발해를 나라(國)로 봉하고 문왕(흠무, 欽茂)을 왕(王)으로 삼았으며 검교태위(檢校太尉)로 승진시켰다는 기록(寶應元年 詔以渤海爲國 欽茂王之 進檢校太尉)이 있다. 이는 문왕 사후 아들인 강왕이 즉위하여 군왕(郡王) 직위를 계승한 뒤 당에 부왕을 국왕으로 추존해달라고 요청하여 책명받았다는 구당서의 기록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어, 정확한 사실 관계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당나라가 문왕을 왕으로 인정했음에도, 발해 내부에서는 문왕을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가독부'''(可毒夫), '''성왕'''(聖王), '''기하'''(基下)[2] 등으로 칭하며 하늘의 후손이자 황제로 여겼다.[3] 이는 발해가 당과의 외교 관계 속에서도 독자적인 위상을 유지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2. 3. 일본과의 관계
문왕은 재위 기간 동안 일본과의 외교 및 무역 관계 증진에도 힘썼다. 문왕 시대에 일본으로 파견된 사절은 십수 차례에 달했으며, 사절단의 규모도 점차 커졌다.746년(대흥 9년)에는 공식 사절 파견 외에도 발해인과 철리인 천백여 명이 일본으로 건너가 민간 무역을 시도하려 한 기록이 있어, 발해가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752년(대흥 15년)에는 보국대장군 모시몽(慕施蒙) 등을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하여 신라를 함께 정벌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과거 고구려가 일본에 신하로서 예의를 갖추었던 점을 언급하며 발해가 신하를 칭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았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758년, 발해는 양승경(楊承慶)을 대표로 하는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는데, 이때 국서에 국호를 '''고구려국왕'''(高麗國王)으로 표기했다. 이에 일본 측에서도 문왕을 고려국왕이라 칭하며 국서를 보내왔다. 일본 헤이안 시대의 궁성인 헤이조궁(平城宮) 터에서 발견된 목간(木簡) 중 758년에 제작된 것에는 발해 사신을 '견고려사'(遣高麗使)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같은 해, 일본은 신라 정벌 계획을 세우고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으나, 일본 내부의 정치적 문제(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숙청)로 계획은 중단되었다. 이후 778년 일본이 발해 사신을 보낼 때에도 '송고려객사'(送高麗客人)라고 칭하는 등, 일본은 발해를 고구려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였다. 일본 왕실 창고인 정창원(正倉院)의 문서에도 762년 일본에 왔던 발해 사신 왕신복(王新福) 일행을 '고려객인'(高麗客人)으로 기록하고 있다.
772년 3월, 문왕은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이때 일본 천황에게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천손'(天孫)이라 칭하고, 발해와 일본의 관계를 장인과 사위의 관계(舅甥)로 표현했다. 이는 고구려 역대 왕들이 사용했던 천손 의식을 계승한 것으로, 스스로를 천하의 주인인 천자(天子)로 여기는 발해의 강한 국력과 자신감을 보여주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고닌 천황은 고구려 때에도 형제를 칭했는데 장인과 사위 관계 운운하는 것은 외교적 결례라며 격노하여 발해 사신에 대한 예우를 철회하려 했다. 다행히 발해 사신 만복(萬福)이 서식 표현을 수정하겠다고 나서면서 외교적 마찰은 무마되었다.[9]
발해의 대일 외교는 초기에는 군사적,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727년부터 759년까지 파견된 5차례의 사신은 모두 무관이 대표였으며, 안사의 난에 대한 정보 교환이나 당나라에 갔다가 귀국이 어려워진 견당사를 발해를 통해 귀국시키는 등의 목적도 있었다. 760년 전후에는 일본과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하려는 계획도 논의되었으나, 발해가 최종적으로 반대하여 실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762년 이후 파견되는 사절단의 대표가 문관으로 바뀌면서, 일본과의 관계는 신라 견제를 위한 군사적 목적보다는 점차 문화적, 경제적 교류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2. 4. 신라와의 관계
문왕(文王)의 치세 동안 신라와의 관계가 강화되었다. 당시 신라는 발해 남쪽의 한반도를 통일한 상태였으며, 이 시기에 '신라도(新羅道)'라고 불리는 무역로가 발전하였다.[1]2. 5. 내정
737년 아버지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왕은 재위 기간 동안 발해의 내정에 힘썼다. 즉위 직후 대대적인 사면령을 단행하였으며,[9]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연호인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을 사용하여 자주적인 면모를 보였다.문왕 시대에 발해의 중앙 및 지방 제도의 틀이 대부분 확립되었다. 신당서 <발해전(渤海傳)>에는 발해가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발해의 실정에 맞게 변형하고 선별적으로 수용하였다. 당시 당나라의 선진적인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나, 발해는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중앙 정부 조직은 당나라의 3성 6부를 기본으로 구성되었지만, 그 명칭과 운영 방식에서 차이를 보였다. 발해의 3성은 선조성, 중대성, 정당성으로 당나라와 이름이 달랐다. 특히 행정을 총괄하는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정책 심의 기구인 선조성과 중대성의 좌상, 우상보다 지위가 높아 실질적인 최고 권력 기구 역할을 했다는 점이 당나라와의 큰 차이점이다. 6부 역시 당나라의 이·호·예·병·형·공이 아닌 유교 덕목을 반영한 충·인·의·지·예·신으로 구성하여 독자성을 드러냈다.
지방 제도에서는 당나라의 5경제를 본받아 상경, 동경, 중경 등을 설치하고 780년대에는 동경 용원부로 천도하기도 하였다. 『속일본기』 기록을 통해 남해부의 존재와 동경의 명칭으로 미루어 서경 또한 정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에 발해의 5경제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5경제는 후대의 요나라와 금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외에도 문왕 대에는 산관 제도와 훈작 제도가 정비되었다.
교육과 문화 측면에서도 발전을 이루었다. 당나라의 국자감을 모델로 한 국립 교육기관인 주자감(胄子監) 설립을 인가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또한 많은 발해 학자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선진 학문을 습득했으며,[1] 불교와 유교를 장려하여 통치 이념으로 활용하였다. 신라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교역로인 신라도(新羅道)를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문왕은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는데(상경, 동경 등), 이는 확장된 영토 내 다양한 민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비록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 등으로 책봉받았지만, 발해 내부에서는 문왕을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가독부(可毒夫)', '성왕(聖王)', '기하(基下)'[2] 등으로 칭하며 황제에 준하는 위상을 부여하였다.[3] 772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는 스스로를 '천손(天孫)'이라 칭하기도 했다.[9]
문왕은 5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재위하며 발해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793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딸들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이 발견되어 당시 발해의 문화와 사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4]
2. 6. 수도 이전
발해가 처음 건국된 곳은 동모산(東牟山)으로, 이곳은 구국(舊國)이라 불렸다. 문왕은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중경현덕부: 742년 무렵, 문왕은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를 건설하고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다.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서고성자(西古城子) 유적으로 비정되며, 철과 베(布), 쌀 생산이 많은 지역이었다.
- 상경용천부: 755년 무렵, 다시 수도를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겼다. 이곳은 현재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동경성진(東京城鎭) 일대로, 북쪽에 위치한 말갈족 등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된다.
- 동경용원부: 785년 무렵, 문왕은 또다시 수도를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겼다. 이곳은 해양 교통의 요지로, 현재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팔련성(八連城) 지역으로 추정된다.
문왕은 이처럼 세 차례 수도를 옮김으로써 발해의 여러 지역을 개발하고 통치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얻었다. 또한 발해는 이들 3경 외에 남경남해부(현재 함경북도 청진시 부근으로 추정)와 서경압록부(현재 중국 지린성 린장시 부근으로 추정)를 더 설치하여 5경(五京) 제도를 갖추었다. 이 5경 제도 역시 문왕 때 확립된 것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 발해의 넓은 영역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을 이루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5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수도는 상경이었으며, 793년 성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수도가 되어 발해 멸망 시까지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2. 7. 죽음
문왕은 즉위 이후 56년 동안 재위하다가 793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인 태자 대굉림이 일찍 사망하여, 종제(사촌 동생)인 대원의와 손자인 성왕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으나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이후 문왕의 막내아들인 강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사후에 아들인 강왕이 당나라에 요청하여 국왕으로 추증되었다. 구당서 199권에 따르면, 강왕은 즉위 당시 군왕(郡王)이었으며, 당나라에 사절을 보내 부왕인 문왕을 국왕(國王)으로 추존해 줄 것을 요청하여 책명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신당서 219권에는 762년(보응 원년)에 이미 당 숙종이 발해를 나라(國)로 봉하고 문왕(흠무)을 왕(王)으로 봉했다는 기록(寶應元年 詔以渤海爲國 欽茂王之 進檢校太尉중국어)이 있어, 강왕이 군왕 직위를 계승했다는 구당서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3. 묘 발굴
1949년 중국 지린성 화시 육정산 고분군에서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 묘가 발견되었고, 1980년 같은 성 화룡현 룽터우산에서는 넷째 딸인 정효공주 묘가 발굴되었다. 발해 공주의 무덤이 발굴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매우 드문 사례이다. 또한 2004년 혹은 2005년에는 룽터우산 고분군의 14기 무덤 중 문왕의 황후인 효의황후(孝懿皇后)의 묘도 발굴되었다.[10]
문왕의 두 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에서 나온 묘지명을 살펴보면, 중국 고전 문학 작품을 다양하게 인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두 묘지명의 내용이 거의 같아, 당시 발해에 정형화된 묘지명 양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문왕 시대에 유교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정효공주 무덤은 무덤 위에 탑을 세우는 탑장(塔葬) 형식이며, 묘지명에 쓰인 문왕의 존호(尊號)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에는 '금륜성법'이라는 불교적 용어가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문왕 시대 발해에서 불교가 크게 융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지명에는 아버지 문왕을 황상(皇上)이라고 표현했는데,[11] 이는 신하가 황제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문왕은 즉위 초부터 대흥(大興), 774년부터 보력(寶曆), 780년대에는 다시 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제국을 지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4. 외교 활동
문왕의 치세 동안 발해는 주변국들과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아버지 무왕 대까지 이어졌던 당나라와의 긴장 관계는 완화되어 평화적인 기조 아래 문물 교류가 활발해졌다. 762년 당나라는 발해의 성장한 국력을 인정하여 기존의 '발해군왕(渤海郡王)' 대신 '발해국왕'으로 책봉하기 시작했다.[1] 하지만 발해는 내부적으로 문왕을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가독부(可毒夫)', '성왕(聖王)', '기하(基下)' 등[2] 황제에 준하는 칭호로 부르며[3] 고구려를 계승한 천손(天孫) 국가로서의 독자적인 위상을 내세웠다.
일본과의 관계도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문왕은 752년 모시몽(慕施蒙)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했으며, 특히 758년 이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는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 칭하여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다. 일본 측 기록에서도 발해 사신을 '견고려사(遣高麗使)'나 '고려객인(高麗客人)'으로 표기한 사례가 확인된다. 771년에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을 천손이라 칭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장인과 사위(舅甥)에 비유하여 일본의 항의를 받기도 했는데, 이는 강성해진 국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초기에는 신라 견제를 위한 군사적 목적의 교류가 논의되기도 했으나(758년, 760년 전후), 점차 경제적, 문화적 교류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762년 이후 파견된 사절단의 대표가 무관에서 문관으로 바뀐 점에서도 확인된다.
신라와의 관계 역시 개선되었다. 733년 당의 요청으로 신라가 발해 남부를 공격한 일도 있었으나, 이후 발해와 당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신라와의 긴장도 완화되었다. 757년 신라는 발해와의 교섭 창구로 탄항관문(炭項關門)을 설치했으며, 발해는 동경용원부에서 남경남해부를 거쳐 신라 국경에 이르는 교통로인 '신라도'(新羅道|신라도한국어)를 정비하고 39개의 역을 설치하여 지속적인 교역과 교류를 뒷받침했다. 764년에는 당나라 사신이 신라도를 통해 발해에서 신라로 이동하는 등, 문왕 시기 양국은 대체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4. 1. 당나라와의 외교
발해의 시조 고왕부터 무왕 대까지 당나라와는 격전을 치르는 등 긴장 관계가 이어졌다. 이러한 갈등의 영향으로 당나라는 한동안 발해의 군주를 국가의 왕이 아닌 지방의 통치자라는 의미로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 낮춰 불렀다.그러나 문왕(文王) 대에 이르러 발해의 국력이 크게 성장하자, 당나라도 더 이상 발해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762년부터 당나라는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인정하며 책봉하였는데, 이는 발해의 높아진 위상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1] 문왕의 치세 동안 발해와 당나라의 외교 관계는 기본적으로 평화적 기조를 유지했으며, 양국 간 문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문왕은 즉위 직후부터 당나라에 적극적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재위 기간 동안 기록된 것만 50회가 넘는 조공 사절 파견이 확인된다. 이는 당과의 관계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선진적인 문화와 제도를 배우려는 목적이 컸다. 고왕 대조영이나 무왕 시대에도 유학생 파견과 한적 도입이 있었지만, 문왕 대에 이르러 유학생 수가 크게 늘어났고, 더 많은 서적들이 발해로 유입되었다.
당나라와의 활발한 교류는 발해 사회에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1] 문왕은 당나라 국자감을 모델로 하여 발해의 국립 교육기관인 '주자감(胄子監)'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 만들어진 정혜공주묘와 정효공주묘의 묘지명에는 『상서』, 『시경』, 『역경』, 『예기』, 『춘추』, 『논어』, 『맹자』, 『사기』, 『한서』, 『후한서』, 『진서』 등 다수의 중국 고전이 인용되어 있어, 당시 발해가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비록 당나라가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인정했지만, 발해 내부에서는 문왕을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가독부(可毒夫)', '성왕(聖王)', '기하(基下)' 등으로 칭하며[2] 하늘의 후손이자 황제와 같은 존재로 여겼다.[3] 이는 발해가 당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도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하며 국가적 자부심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4. 2. 일본과의 외교
727년부터 시작된 일본과의 교류는 문왕 시대에 더욱 활발해져, 십수 차례에 걸쳐 사절이 파견되었고 사절단의 규모도 커졌다.752년에는 보국대장군 모시몽(慕施蒙)을 사신으로 일본에 보냈다. 758년에는 양승경(楊承慶)을 대표로 한 사신단을 파견했는데, 이때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문왕은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칭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인식을 명확히 드러낸 것이다. 일본 헤이안 시대의 궁성 터인 헤이조궁에서 발견된 758년 목간(木簡)에는 발해 사신을 '견고려사'(遣高麗使)라고 기록하고 있어, 일본 측에서도 발해를 '고려'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778년 일본이 보낸 사신 관련 기록에도 '송고려객사'(送高麗客使)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또한 762년 일본에 갔던 사신 왕신복(王新福) 일행이 763년 동대사를 방문했을 때의 기록(일본 왕실 창고 정창원 소장 '악구궐실병출납장')에도 이들을 '고려객인'(高麗客人)이라고 칭한 것을 볼 수 있다.
문왕은 단순히 국호만 고려라 칭한 것이 아니라, 771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는 자신을 고구려의 역대 왕들처럼 '''천손'''(天孫)이라 칭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장인과 사위의 관계인 '구생'(舅甥)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천하의 주인, 즉 천자(天子)임을 자처하는 표현으로, 일본 측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외교적 태도는 당시 발해의 국력이 강성해졌음을 보여주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초기 발해와 일본의 교류는 신라를 견제하려는 정치·군사적 목적이 강했다. 758년 일본은 신라 정벌 계획을 세우고 오노노 다모리(小野 田守)를 사신으로 보내 발해의 협조를 구하려 했다. 당시 오노노 다모리는 이전에 신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모욕을 당한 인물이었다. 발해는 이에 양승경, 양태사(楊泰師), 풍방례(馮方禮) 등을 답사로 보냈으나, 신라 정벌을 주도하던 일본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 仲麻呂)가 숙청되면서 계획은 중단되었다. 760년 전후에도 발해와 일본 사이에서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하려는 계획이 논의되었으나, 일본 측의 적극적인 태도와 달리 발해는 최종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정치·군사적 성격은 점차 변화하여 문화·경제적 교류가 중심이 되었다. 727년부터 759년까지 다섯 차례 파견된 사신의 대표는 모두 무관이었으나, 762년 이후에는 문관으로 바뀌었다. 이는 양국 관계의 중심이 군사적 협력에서 경제적, 문화적 교류로 이동했음을 시사한다. 초기에는 안사의 난에 관한 정보 교환이나, 난으로 인해 귀국이 어려워진 일본의 견당사를 발해를 경유해 귀국시키는 등의 역할도 있었으나 점차 경제 교류의 비중이 커졌다.
국가 간의 공식적인 사절 파견 외에도 민간 차원의 교류도 시도되었다. 746년에는 발해인과 철리인 1,100여 명이 일본을 방문하여 민간 무역을 시도하는 등, 문왕 대에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외교 정책이 다방면으로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3. 신라와의 외교
733년 신라는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발해의 남부 지역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신라와의 긴장 관계도 점차 완화되었다.[1]문왕(文王)의 치세 동안 발해는 신라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힘썼다. 757년 신라는 발해와의 교섭 창구 기능을 담당할 탄항관문(炭項關門)을 설치했다. 발해 역시 교류를 위해 노력했는데, 5경 중 하나인 동경용원부에서 남경남해부를 거쳐 신라 국경에 이르는 교통로인 '신라도'(신라도|新羅道한국어)를 정비하고 그 경로상에 39개의 역(驛)을 설치했다. 이는 두 나라 사이에 지속적인 교역과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실제로 764년에는 당나라 사신이 이 신라도를 이용하여 발해에서 신라로 이동하기도 했다. 이처럼 문왕 시기 발해와 신라는 대체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교류를 이어갔다.
5. 통치 제도 정비
무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인안 19년(737년)에 왕위를 계승하고, 이듬해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바꾸었다. 즉위 후 당나라는 내시를 파견하여 문왕을 발해군왕 좌효위대장군 홀한주도독으로 책봉하였다. 문왕의 치세는 당나라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문치(文治)에 중점을 둔 시기였다.
문왕 즉위 이전 발해는 부족제와 군현제가 함께 운영되었으나, 문왕은 당나라의 제도를 따라 상경 용천부를 중심으로 부(府)와 주(州)를 설치하여 중앙 집권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중앙 통치 기구로 3성 6부 제도를 정비하여 지배 체제를 강화했으며, 산관 제도와 훈작 제도도 이 시기에 정비되었다. 교육 기관으로는 당나라의 국자감을 본떠 국립 아카데미인 주자감(胄子監) 설립을 인가했다.
지방 통치 체제로는 당나라의 5경제(五京制)를 본받아 상경, 동경, 중경을 설치했다. 780년대에는 동경 용원부로 수도를 옮기기도 했는데, 이는 확장된 영토 내 여러 민족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중앙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속일본기』 기록에 남해부의 명칭이 등장하고, 동경의 존재로 미루어 서경 역시 정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이 시기에 발해의 5경 제도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5경제는 후대의 요나라와 금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외교적으로는 당나라와 공식적인 관계를 수립하여 많은 발해 학자들이 당으로 유학을 떠났으며,[1] 이를 통해 불교와 유교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남쪽의 신라와도 관계를 강화하여 '신라도'(新羅道)라는 무역로 발전을 감독했으며, 일본과도 외교 및 무역 관계를 증진시켰다.
비록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발해 내부적으로는 문왕을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가독부'(可毒夫), '성왕'(聖王), '기하'(基下) 등 독자적인 존칭으로 불렀으며,[2] 스스로를 하늘의 후손이자 황제로 칭하며 독자적인 천하관을 드러냈다.[3]
5. 1. 안사의 난의 영향
당나라에서 절도사인 안록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안사의 난은 발해에도 영향을 미쳤다. 안록산은 평로절도사로서 발해와 흑수 등 4개 지역의 경략사 직책을 겸하고 있었는데, 당시 관제상 발해 도독부의 상급 기관에 해당했기 때문에 안사의 난은 발해의 상급 기관이 일으킨 반란으로 볼 수 있었다. 문왕은 이 반란이 발해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서쪽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는 한편, 일본과도 연락하며 상황에 대비했다.755년 (대흥 18년), 안록산이 이끄는 연나라 군대는 당나라의 동쪽 수도인 낙양을 점령하고 동관을 거쳐 장안까지 진격했다. 이로 인해 당 현종은 사천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영주 지역이 불안정해지면서 발해와 당나라 사이의 교통로가 끊겼고, 이후 약 4년 동안 당나라 기록에는 발해가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교통이 끊긴 상황에서도 당나라는 지방 기관을 통해 두 차례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 첫 번째는 756년 (대흥 19년) 가을, 평로절도사의 대행이었던 서귀도가 보낸 사절로, 반란 진압을 위한 군대 파견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귀도가 이미 당나라를 배신하고 안록산에게 투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발해는 군대 파견을 보류했다. 두 번째는 757년 (대흥 20년), 권지평로절도사 왕현지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장군 왕진의를 파견한 것이다. 이때는 당 현종이 사천으로 피난하고 태자 이형이 영무군에서 즉위하여 장안과 낙양 수복을 계획하던 시기였으므로, 이와 관련된 요청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때에도 문왕은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구체적인 군사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발해는 안사의 난 동안 연나라에 협력하거나 혼란을 틈타 세력을 확장하려 하지 않고, 시종일관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당나라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인 759년 (대흥 22년)에 양방경을 당나라에 보내 입조하고 다음 해 정월을 축하한 것은 이러한 입장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 이에 당나라도 762년 (대흥 25년)에 문왕의 작위를 기존의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격상시켜 주었는데, 이는 안사의 난 기간 동안 발해와 당나라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6. 가족 관계
문왕의 가족관계는 기존 문헌 기록만으로는 아들 대굉림과 손자 성왕 대화여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정혜공주묘지와 정효공주묘지가 발굴되면서 더 자세한 내용이 밝혀졌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 고왕 대조영 (高王 大祚榮) | 발해 건국자 |
조모 | 임씨 (任氏) | |
부왕 | 무왕 대무예 (武王 大武藝) | 재위: 719년 ~ 737년 |
형 | 대도리행 (大都利行) | ? ~ 728년[12] |
형 | 대번 (大蕃) | [13] |
동생 | 대의신 (大義信) | [14] |
동생 | 대욱진 (大勗進) | [15] |
종제 | 대원의 (大元義) | 폐왕, 재위: 793년[16] |
황후 | 효의황후 (孝懿皇后) | |
장남 | 대굉림 (大宏臨) | 문왕보다 먼저 사망, 성왕 대화여의 아버지 |
차남 | 대정알 (大貞斡) | 당나라에 사신으로 감[20][21] |
3남 | 대청윤 (大淸允) | |
4남 | 강왕 대숭린 (康王 大嵩璘) | 재위: 794년 ~ 809년 |
아들 | 대영준 (大英俊) | 출생 순서 불명확[17][18][19] |
장녀 | 이름 미상 | 요절 (732년 출생 추정) |
차녀 | 정혜공주 (貞惠公主) | 737년 ~ 777년 |
3녀 | 정연공주 (貞延公主) | 747년 출생 추정 |
4녀 | 정효공주 (貞孝公主) | 757년 ~ 792년 |
손자 | 성왕 대화여 (成王 大華璵) | 대굉림의 아들, 재위: 793년 ~ 794년 |
손자 | 정왕 대원유 (定王 大元瑜) | 강왕 대숭린의 아들 |
손자 | 희왕 대언의 (僖王 大言義) | 강왕 대숭린의 아들 |
손자 | 간왕 대명충 (簡王 大明忠) | 강왕 대숭린의 아들 |
외손자 | 대능신 (大能信) | 정효공주의 아들[22] |
7. 대중 문화
참조
[1]
웹사이트
A Concise History of Korea
http://xenohistorian[...]
2012-03-10
[2]
서적
New Book of Tang vol.209
https://zh.wikisourc[...]
[3]
웹사이트
야청도의성(夜聽도衣聲)
http://www.seelotus.[...]
[4]
웹사이트
http://www.kcna.co.j[...]
[5]
뉴스
渤海国的“朋友圈”︱偏居一隅的渤海国如何走出去
https://m.thepaper.c[...]
[6]
백과사전
글로벌세계대백과
[7]
문서
룽터우산 고분군 M12 묘지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8]
뉴스
‘발해는 고구려 계승한 황제국’ 증거유물 나와
http://www.munhwa.co[...]
[9]
서적
『續日本記』卷32, 寶龜 3年 2月 己卯
[10]
뉴스
중국 지린성서 발해 황후 묘지 발굴
https://news.naver.c[...]
[11]
문서
정효공주묘비 중 "'''황상'''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皇上'''罷朝興慟)"
[12]
문서
당에서 숙위로 있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13]
문서
735년과 743년에 당에 사신으로 갔다.
[14]
문서
726년 당에 숙위로 파견되었다.
[15]
문서
739년 당에 사신으로 갔다.
[16]
문서
고왕의 손자다.
[17]
문서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774년 돌아왔다.
[18]
문서
791년(貞元 7년) 정월 대상청(大常淸)이 (唐)에 사신으로 가 위위경동정(衛尉卿同正)을 받고 돌아왔다고 하는데, 대영준이 대상청과 동일 인물일 수 있다.
[19]
문서
[[발해고]]에서 대청윤(大淸允)이라는 인물이 문왕 때의 왕자로 소개되는데, 대영준의 오기인 듯 하다.
[20]
문서
794년 성왕이 붕어하였을 때 대정알이 당에 있었기 때문에 강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왕위 계승 서열에서 강왕보다 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21]
문서
[[발해고]]에서 대정한(大貞翰)이라는 인물이 문왕 때의 왕자로 소개되는데, 대정알의 오기인 듯 하다.
[22]
문서
798년 우후루번장 여부구(茹富仇)와 함께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발해고]]에서 강왕의 조카라 했는데, 아버지는 대정알이나 대영준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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